2014.02.03 14:53

파진산(破陣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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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聖王)이 공주에서 부여 소부리(所夫里)로 도읍을 옮기고 사자강을 서로 하여

제방(堤防)겸 성을 쌓고 동편으로 지금 염창리(鹽倉里)에서 부여의 주산(主山) 부소산에

걸쳐 긴 성을 쌓으시니 주위가 약 이십 리가량 된다。

 

성안에 백성이 살 수 있을 만큼 모든 토목공사를 일으키며 불교의 정신을 고취하여 소위 비상시의

기운이 농후하였다。

물론 역대임금이 이리저리로 수도를 옮김으로 모든 시정방책에 부드럽게 되지 않으며 또 일정한

도읍을 두지 않으므로 민심이 흩어져서 옮긴 후의 옛 서울에는 혹은 고구려로 가는 백성이며 신라

국경을 넘는 백성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이런 소문을 역대왕은 모름이 아니었으나 국력이 충실치 못한 관계로 부득이 이렇게 도읍을 자주

옮긴 것이라고 생각 된다。

 

성왕도 부여로 서울을 옮길 적에는 이곳에서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길 마음은 다시 두지 않았던 것

이었다。

그리하여 성도 대규모의 토성(土城)을 쌓았으며 수륙요로에는 오리 혹은 십리마다 조그마한 성을

두어 외적을 막고 각처에 중요한 성을 쌓아서 어떠한 강적이 오더라도 막아낼 심산 이었다。

 

안으로 국민의 정신을 한층 높이며 나라의 관념을 고취하고 백성의 부력(富力)을 증진시키는

동시에 일편 군사를 양성하여 한마디의 명령 하에 능히 백만의 군사를 손가락 놀리 듯 하게끔

모든 정치의 중점을 부국강병에 두었다。

그리하여 대대 임금이 유언과 같이 다음 왕에게 전승하게끔 되었던 것이었다。

 

이웃 신라와 고구려나라에게 해마다 국경에 있는 성을 빼앗기고 백성을 빼앗기던 백제가 부여로

서울을 옮긴 후로는 그전에 빼앗겼던 성을 도로 찾을 뿐만 아니라 백제나라가 충실함에 따라

도리어 신라와 고구려의 국토를 넘어다보며 싸워 빼앗은 성들도 많았다。

 

이렇게 하기를 백여 년 동안 하고보니 참으로 백제나라는 충실하여져서 문명의 정도가 말할 수

없이 높아지며 문물의 정돈됨이 이웃나라에서 배워 가기까지 되었다。

수로로 중국의 양(梁) 진(晋) 당(唐) 여러 나라에서 고도의 문명을 수입하고 고유한 국내의 풍속을

잘 길러 내어서 멀리 왜국(倭國)에까지 이곳 백제의 문명이 흐르게 되였고 또한 신라에도 미치게

되였다。

 

그러면 오늘날에 와서 백제나라가 국토를 영유한 678년 동안에 이곳 부여 서울시대의 120년

문명이라는 것은 황금시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부조(父祖)의 힘으로 쌓아놓은 국력은 의자왕으로 하여금 암흑의 길로 빠지게 하였다。

강하고 먹을 것이 풍부하니 이웃나라에서 감히 넘어다볼 생각도 못할 것임에 국민은 안락 그것 뿐

이었다。

 

집집마다 노래와 춤이 끊일 사이가 없으니 생산은 점점 줄어가고 국민의 정신은 타락하여갈 뿐

이었다。그러자 이웃 신라에서는 이런 기회에 계속 당하여 오던 굴욕을 풀어보리라 하고 당나라와

연합하여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단숨에 국경선을 넘어 부여 서울 5,60리 가까이 달려들었다。

 

그때에 백제에서는 부랴부랴 동원령을 내리며 병정을 뽑아보았으나 오합지졸(烏合之卒)로 한번도

칼과 활을 만져본 적이 없는 군사뿐이라 제일선 황산(黃山)전장에는 오천 명의 결사대쯤은

보내 보았으나 군사의 수가 부족하여 패배를 당하고 제이선 당산성 제삼선 반월성에는 서울 안

15만 2천 3백호에서 기운꼴 쓰는 놈을 데려왔으나 훈련이 없는 군사요 규율이 없는 병정이고 보니

명령에 못 이겨 나오기는 하였으나 실지 싸움터로 가서는 밤으로 상관의 눈을 피하면 도망을 가니

이름만 몇 만 명이요 적을 막는 군졸은 불과 몇 천 명이 되지 못하였다。

 

제이선 당산성에 있던 장사는 훈련이 없고 더구나 부족한 군사로 갖은 꾀를 다 내어 보았다。

본진을 당산성(주위가 1000m로 石城임)에 두고 앞산에 실전지(實戰地)를 두어 소정방의 군사를

막았다。

 

소정방은 불암나루에 임시 둔(屯)을 이루고 점점 사자강 왼편을 끼고 부여로 기어들기 시작하니

양군은 이 백제 제이선에 이르러 격전이 벌어졌다。

백제에서는 지구전(持久戰)과 방어전술(防禦戰術)이요 당나라는 속결전(速決戰)이요 공격전략

(攻擊戰略)이었다。

 

이삼 주일을 지나 백제에는 도망하는 병정이 많아져서 도저히 계책(計策)이 나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제이선 앞산에 섬거적을 곡식노적처럼 보이도록 하여 군량이 많다는 것을 암시하여

보았으며 어느 때는 쌀을 수백 석씩 씻어서 뜨물을 사자강 하류로 보내기도 하여 군인의 밥 짓는

쌀뜨물이 이같이 많아 병정 또한 많다는 것을 은연히 보이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이렇게 하여도 안 되고 저렇게 하여도 당나라군을 속일 수가 없어서 당장 보이는

이편에서 몇 백 명 안 되는 백제의 군사를 낮이면 부여 쪽에서 응원병이 오는 것같이 돌려

빼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약삭빠른 소정방은 그저 공격뿐이어서 하는 수 없이 제이선이 패진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조수(潮水)같이 밀려드는 당병은 그만 백제 제이선을 돌파하여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반월성 남둔이 되는 군들(당나라군이 부여성으로 들어 왔다하여 군들리(軍入里)라 함)로 송사리

떼처럼 들어왔고 제삼선 반월성은 본진을 금성산(錦城山)에 두고 성의 동문(지금 동문다리는

나성(羅城)일부요, 논산 쪽 왕릉 가는 길목)을 지키고 일부 군사로는 군들고개를 지켰으나 강약

부동(强弱不同)으로 이 두 곳은 무인지경같이 당군의 통과지(通過地)가 되어버렸다 한다。

 

그리하여 백제군 제이선이 패군한 당산성 앞산을 파진산이라고 부른 것도 이때부터이며 제삼선

본진(本陣)이 되는 금성산 동편 산머리에 말구스바위가 있고 장자가 있던 곳이라 하여 백제시대의

기와가 많이 있음도 이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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