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선조대왕 태실비는 어디에 있을까?


200여년이나 앞선 원조 선조대왕 태실비에 대한 관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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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덕사 경내에 있는 선조대왕 태실비 이 태실비가 영조 때 새로 세운 선조대왕의 두 번째 태실비이다. ⓒ 오창경

 

선조 대왕(조선 14대 임금 1552~1608) 태실비(문화재 자료 117호)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개인 블로그에 여러 사람들이 그 태실비를 보러 왔었고 사진과 기록을 남긴 것을 보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내가 사는 곳은 충남 부여에서도 오지로 여겨지는 곳이라 선조 대왕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일부러 찾아오기는 어려운 곳이다. 내가 인터넷 검색을 한 이유는, 선조대왕 태실비에 대한 자료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 태실비에 대한 인지도가 어느 정도 수위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선조 대왕의 태실비가 있는 동네에 살고 있는 주민인 내가 궁금증만 가지고 있었을 뿐 알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에 비하면 그런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있는 선조 대왕 태실비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정보는 선조 대왕 태실비가 충남 부여의 오덕리 오덕사라는 사찰에 있고 안내 간판에 쓰여 있는 대로 영조 임금 시절에 다시 만들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글자가 마모된 첫 비석의 존재 유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러면 그 글자가 마모된 처음 건립된 비석은 어디에 있을까? 비석이라는 것이 글자가 마모될 수는 있어도 함부로 없애기는 어려운 물건이다. 더구나 왕의 태실비인데 함부로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선조대왕 태실 비에 대해서 알리지 않았던 것은 그 비문에 적힌 한자어를 해석할 만한 실력이 안 되기도 했고 얄팍한 지식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파하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이제 동네에서 원주민 못지 않은 세월을 지내다 보니 많은 인맥을 쌓아가게 되었다. 비문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조예가 깊은 사람과도 교류하게 되어 자문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진현(65)님은 공직에서 퇴임을 한 후에 비석과 비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부여 곳곳에 널린 향토 유적들의 내력을 궁금해 하다가 조선 왕조 실록을 읽게 되었고 개인의 역사가 담긴 비석과 비문의 해석에 대해 지식을 쌓게 되었다. 그는 혼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유물과 유적을 답사하면서 답사기를 몇몇 사람들에게만 공개해왔다. 우연히 그의 답사에 동행했다가 우리 동네에 방치되어 있는 비석과 비문에 대해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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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재위 3년에 만든 첫번째 태실비 개인의 비석과는 다른 왕가의 권위가 느껴지는 비석이지만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져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 오덕사에 있는 태실비보다 200여년이나 앞서 조성된 선조의 태실비이다. ⓒ 오창경


나의 부탁으로 답사 일정에 우리 동네를 넣어서 일부러 찾아 온 그는 방치된 그 비석의 포스에 감탄사부터 내뱉었다. 그는 첫 눈에 그 비석의 머리부분에 새겨진 이룡(螭龍) 문양의 높은 수준에 대해 말해주었고 비의 머리와 비신을 따로 만들어 올려놓은 일반적인 비석의 모습이 아니라 통돌로 조성한 특이한 모양이라고 했다. 


비석의 앞면에는 '주상전하 태실비(主上殿下 胎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선조 3년 (1570년)에 태를 봉하고 태봉산에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 써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 동네 태봉마을 한구석에 방치된 비석은 선조 대왕의 원조 태실비였고 오덕사 경내에 있는 태실비는 그 비의 글자가 마모되어 영조 23년 (숭정 후 120년)에 다시 세운 두 번째 태실비라는 것이다. 부여실록(부여문화원 1998, 조선왕조실록에서 '부여'에 관한 기록만 발췌하여 발행한 책)에도 전 충청감사 서종급(徐宗伋)이 영조에게 선조대왕 태실비의 글자가 마모되어 다시 세워야 한다고 간언을 해서 다시 세우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봉마을 한 구석 쓰레기 더미 속에 작은 간판 한 개도 없이 방치된 비석을 바라보면서 항상 찝찝했던 기분이 일시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좀더 기록을 찾아보니 일제 강점기에 태봉산을 일본인에게 팔게 되면서 선조의 태 항아리는 일본으로 가져가고 비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61년에 충화면 면장이 태봉 산에서 내려서 원조 비석은 태봉 마을에 두고 두 번째 비석은 오덕사 경내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여기가 부여다 1992 최문휘 저>


그 비석들이 따로 서있게 된 이유는 아마도 비석을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산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고 동네 사람들이 두 기를 다 오덕사 경내로 옮겨 놓는 것을 반대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는 동네 어르신들도 그 비석이 원조 선조대왕이 태실비라는 것을 아는 분이 없다. 


선조대왕 태실비가 있던 태봉산 이 진현 님에 의하면 조선 왕조의 태실비는 평지에서 발복하라는 의미에서 높은 산보다는 마을과 가까운 낮은 산에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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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대왕 태실비가 있던 태봉산 이 진현 님에 의하면 조선 왕조의 태실비는 평지에서 발복하라는 의미에서 높은 산보다는 마을과 가까운 낮은 산에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오창경


하지만 현재 원조 선조태왕 태실비가 동네 한 구석 개인의 밤나무 밭에 방치되어 있고 그 주변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이다. 1570년대의 시대 상과 미술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왕가의 유물이 그렇게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수치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도 서러운데 태봉산을 일본인에게 팔았고 태 항아리는 일본으로 유출시키고도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선조대왕 태실비가 두 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예산의 무한정보 신문 이재형 기자는 이런 기사(2015. 10. 5)를 썼다. 예산군에서는 군청 문화재 팀이 헌종 대왕(조선 24대 임금1834~1849) 태실 비를 찾기 위해 덕산면 옥계 저수지를 수중 탐사하는 예산을 세웠고 헌종 태실 비를 인양하면 태실을 복원해 문화재 지정을 할 계획이라는 기사였다. 


최근 부여군청에서도 오덕사에 있는 선조대왕 태실 비에 대한 안내판을 새로 만들어 진입로마다 설치해 놓았다. 그러나 원조 태실 비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원조 태실 비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예산 헌종대왕 태실비에도 '주상전하태실비'라고 새겨져 것으로 볼 때 재위에 있을 당시 태실 비와 승하한 후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두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면 학술적으로도 비교 분석해 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가 있고 관람하는 사람들에게도 태실 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 왕조의 장태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문화라고 한다. 


오덕사에 있는 태실 비 역시 그리 관리 상태가 좋지 못하다. 비석의 하단부인 지대석도 없이 그냥 땅속에 묻혀있기 때문에 풍상에 훼손의 우려가 크다. 원조 태실 비는 지대석은커녕 비신이 올려졌을 귀부는 아예 없어진 상태로 낙엽더미와 쓰레기 속에 왕가의 권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버려져 있다. 태봉 마을에는 더 이상 선조대왕 태실 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고 관련 공무원들 조차 개석하기 전의 원조 태실비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조선 왕조에서는 왕자들뿐만 아니라 공주들의 탯줄도 태함에 보관하고 비를 세웠다. 부여에는 선조 대왕의 태실 비 외에 현종의 둘째 딸인 명혜 공주와 중종과 문정 왕후의 딸인 의혜 공주의 태실비도 있다. 명혜 공주의 태실비는 정림사지에 옮겨서 잘 관리하고 있으며 의혜 공주의 태실비는 규암면 함양리에 있다.   이곳 역시 주변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사진을 찍기에도 부끄럽다. 의혜 공주의 태실비는 향토 유적으로 관리되고 있지만 오덕사의 선조대왕 태실비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문화재 자료이다. 200여년씩이나 앞선 선조대왕 태실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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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에 있는 의혜 공주 태실비와 태함. 중종의 2녀인 의혜 공주의 태실비는 향토 문화 유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 오창경


이런 문화재를 행정적으로 관리하기가 어렵다면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라도 관심을 가지고 보존하는 데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 선조의 후손들인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 파들이 부여군에도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문화재에 대해 너무 소홀했고 잊어왔다. 부여는 찬란한 백제의 유물들 때문에 그 외의 역사와 유물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제 백제 역사와 유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 일반인들은 도처에서 우리와 함께 해온 가까운 역사부터 챙겨야 한다. 멀지 않은 과거부터 알아야 백제도 가까이 보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본 글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오창경님께서 기고해 주신 글입니다.  본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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