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를 걷다. -염창1리-
염창리 입구~ ( 소금창고가 있었다해서 염창리라 불렸다 합니다.)
아름드리 나무가 보이길래 바로 걸어갔습니다.
180년 된 느티나무입니다.
예전엔 단무지 공장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폐허로 남아있네요.
마을 앞에는 축제 물품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습니다. 새로 건물을 짓고 있더군요.
염창리쪽은 수로시설이 잘된듯했습니다. 다른데선 물 흐르는데를 볼수가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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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카이
2015.06.22 23:04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나당군이 침공해 들어올 때는 백제군이 고군분투한 전장터가 염창리였으며 사비성이 무너진 후에도 백제군이 산발적인 투쟁으로 끝까지 백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군사들의 무덤이 많았던 지역으로 손꼽힌다.
고려 때는 한때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마을의 형성은 백제 때부터 이루어져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기에 정착한 탐진최씨가 정착하면서 대마을 단위로 발전해 나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백제때 의염창(義鹽倉)이 있어서 염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상염리, 하염리, 군석리 일부와 석성군 북면의 염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염창리라 하였다가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염창리로, 다시 1960년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염창리가 되었다.
면적은 3.21㎢에 가구수는 166호이며 인구수는 417명이다.
80년대 초에 상염마을에 한국조폐공사 부여조폐창이 건립되었다.
군돌마을에는 백제군이 파진산에서 패하고 최후로 나성을 수비할 때 수차의 접전에서 거듭된 패전으로 군사의 수가 너무나 약세이므로 군석 뒷산인 필서봉을 중심으로 군사들을 빙빙돌도록 하니 신라군이 즉시 침공을 하지 못하여 왕을 피난토록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군사들이 돌던 곳이라 하여 군돌이라 하고 이를 한자로 군석(軍石)이라 표기하였다.
이 군석마을은 조선 성종조 사헌부 감찰과 삼등현령을 지낸 최응하(崔應河)가 폐허된 마을에 입촌하여 주거케 되었던 바 필서봉 아래인 이곳에 살면 학자가 끊기지 않는 길지라 입촌하였다 한다.
동편마을에 최씨 제각인 영모재(永慕齋)가 있고, ‘성안이’는 나성 안에 있는 마을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정보출처 : 부여읍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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