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골과 마래방죽

by 소룡 posted Nov 2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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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골과 마래방죽

 

부여읍(扶餘邑)에서 남으로 1km쯤 가면 꽤 넓은 못(池)이 있고 그 못 북쪽에 동네가 있는데

이 못 이름이「마래방죽」이고, 이 동네는 「마골」이라는 이름을 가졌다。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300년쯤 전 백제(百濟) 제29대 임금인 법왕(法王)때의 일이다。

 

그 때 이 못가에 한 젊은 여자가 살고 있었으니 그는 법왕의 후궁(後宮)으로 오랫동안 이 마래

못가에 기와집을 정결(淨潔)하게 짓고 집 앞뒤에는 보기 좋은 화초를 심어서 아침저녁으로 이곳에

재미를 붙이며 세월을 보내는 중이였다。

 

8월 보름 달 밝은 밤 이었다。

이 청춘의 홀어머니로서는 견딜 수 없는 정열(情熱)에 사창(紗窓)을 반만 열고 못 가의 월색(月色)

을 구경 할 즈음 못물로부터 용(龍)이 나와 이 집으로 향하여 오는 것 이었다。청춘의 홀어머니는

한편 무섭기도 하고, 한편 기이(奇異)하기도 하여 정신이 몽롱하였다。얼마 아니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월색은 고요하고 야심(夜深)한 오경(五更)! 이상도하지? 이것이 생시인가 꿈인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부터 배가 커지며 십 삭 만에 옥동자를 낳았다。

부근 동리사람들과 혹은 샘 길 다니는 부인네 들은 둘 셋만 모여 앉으면 청춘에 홀몸으로 살 수

있나 하고 이야기꺼리를 삼았다。

마침내 도성(都城) 안팎 사람들은 거의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청춘의 부인은 이 아기가 한편 두통거리가 되었으나 또 한편 이 아기만이 장차

나의 생명을 이어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하기도 하였다。

 

모든 사람의 조소도 모르는 듯이 이 아이가 점점 자라 나이를 먹고 보니 기골이 장대하여 범인

(凡人)이 아님이 뚜렷하였다。

그가 차차 커가며 인간성을 짐작하자 자기어머님의 고생을 어떻게 해서라도 덜어드릴 마음이

생겨서 이웃집 아이들과 같이 나무도 하고 산에 가서 마(薯)도 캐어 장에 가서 나무도 팔고 마도

팔아서 생계(生計)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렇기를 오래하는 동안에 동무 아이들로부터 마동이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아주

본 이름과 같이 되어서 마동아? 하면 순진하게도 『왜 그래』이렇게 대답하게쯤 되었다。

이렇게 고생의 세월을 보내는 중에도 인간의 성(性)은 마동(薯童)이가 열일곱 여덟 살 되던 해에

비로소 알게 되자 이 백제나라에서는 자기의 배우자(配偶者)될 처녀가 없을 것을 알고 하루는

어머님에게『어머님?』이렇게 불러놓고 차마 마음에 있는 그 말할 수 없는 심경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어머님은 아들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다 보니 적당한 며느리자리를 골라보라고 이웃집 할머니에게

비밀리에 말을 하여보았으나 불의의 아들을 낳았다는 것으로 이리 핑계 저리 핑계 하고 마동의

장가갈 처녀는 나타나지 아니 하였었다。

 

그리하여 마동이는 이런 눈치를 짐작하자 하루는 조용한 밤에 어머님에게 이런 말씀을 올렸다。

 

 (마동) 어머님! 신라서울에는 사람도 많고 집도 많이 있어서 우리 백제서울보담 훨씬 좋다는데

           한번 가보고 싶어요!

(어머님) 너하고 싶은 대로 신라서울을 가는 것도 좋지만 노자(路資)가 없어서 어떻게 하련?

(마동) 할 도리가 있어요! 산에 있는 마(薯)를 가지고 가면 되지 않아요!

 

이렇게 말을 한 후 마동이는 머리 깍고 상자중 행색으로 간단한 행장을 차려가지고 신라 서울

경주로 길을 떠났다。

지향 없이 산 넘고 물을 건너 며칠 만에 목적지였던 경주에 당도하였다。

신라 장안에 오고 보니 듣는 말소리며 보는 인가(人家)며 사람들이 백제 서울 부여와는 다소 같은

점도 있으나 모든 것이 생소하고 인정풍속이 완연히 달랐다。

 

이 어린소년 마동은 남문 근처 어느 늙수그레한 할머니 사는 집에 주인을 정하고 이리저리 다니며

백제와 다른 것을 구경하였다。

이렇게 며칠을 지내고보니 그때 신라 진평왕 세째 따님 되는 선화공주님의 안색이 둘도 없는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주인공임을 안 마동이는 가지고간 마를 바랑에 넣고 아이들이 많이 모여

노는 곳으로 다니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아이들이 곧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도 가끔

섞어서 말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곳 아이들하고 꽤 친한 관계를 맺었다。이렇게 세월을 보내는데 하루는 마동이가

남문 밖에 가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열어두고 마동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아희들이 그 노래를 듣자 이상하게도 생각하여 한 아이가「너 그 노래를 어느 곳에서 부르든?」

하고 물었다。

마동이는 시치미를 딱 떼고 말하기를 「오늘 저 동문 턱에 갔더니 이런 소리들을 모여 노는 애들이

하더라」이렇게 말하였다。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마동이가 누구야?」「몰라 마동이가 우리 서울 장안에

없는데」「누가 이 장안 아이에도 있는지 아니?」이렇게 주고받고 말을 하는 동안 마동이는

슬며시 바랑주머니에서 군고구마를 내여서 아희들에게 먹였다。

 

아희들은 달콤한 마 먹는 재미에 마동이가 부르는 노래는 점점 머리깊이 들여 박혀져서 속으로

마동노래를 외었다。

이튿날 아이들은 집 문을 나서며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마동이는 이번에는 북문거리에

가서 같은 방식으로 또다시 노래를 부르고 그 이튿날에는 동문 안 다음날에는 서문거리에서 이

노래를 전파시켰다。

 

그러고 보니 신라장안에는 이 노래가 마치 동요같이 부르게 되어 나중에는 장안 사람들이 거의

알게 되어 마침내 궁문에 다니는 대신들이 알게 되자 구중궁궐(九重宮闕)안 진평왕께서도 자연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조정(朝廷)에 있는 모든 벼슬아치들은 이 일이 보통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고 공주님

을 원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는 것이 국치상(國治上)으로 보던지 또는 고유한 미풍양속(美風良

俗)을 보존하는데 적당한 처분이라고 왕에게 말하였다。

 

왕은 일개인의 일이 장차 국민에 미치는 영향이 중대함을 느끼신지라 대신들의 말을 쫒아서 먼곳

으로 공주님을 귀양살이를 시키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공주님의 어머님 되시는 왕후께서는 그래도 모녀의 관계가 각별 깊으신 고로 먼 곳으로

보낼 그 때에 그전부터 모아두었던 순금 한말을 공주님께 내어주며 「너의 한 행실로는 용서할

도리가 없으나 이왕 먼 곳으로 떠나는 마당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혹 급한 기회에 쓰도록 하여라

」는 말씀이 있었다。

 

공주님은 울며 어머님이 주시는 순금 한말을 가지고 길을 떠나 거의 귀양 곳에 도달할 무렵에

마동이 도중에서 나타나서「소인도 공주님이 귀양가시는 곳에 같이 가고자 합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공주님은 어떠한 사람인데 나의 귀양살이에 같이 가기를 말할까 하고 생각은 하였으나 같이

가겠다는 말이 대단 반갑고 우연히 믿음직하고 기뻤다。

이리하여 마동이와 공주님이 수일을 지내는 동안에 차차 친근히 면대도 하고 말도 오고가는

즈음 마동 자기가 그 성명을 발설하자 공주님은 동요생각이 나며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 듯 생각

하고 밤과 낮으로 무상출입을 하는 동안 자연 안면이 익고 못할 말 못할 일 없게 되어 사실상

내외간의 의식(意識)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귀양 가는 목적지를 변경하고 백제 땅으로 발길을 옮기기로 정하였다。

백제 땅으로도 서울에서 떨어진 지금 익산용화산(益山龍華山) 근처로 가서 잠정적(暫定的) 생활

계획을 세우기로 상의가 되었다。

 

처음으로 두 청춘남녀가 가정을 이룩하고 보니 지방도 생소할뿐더러 가진 재물이 없고 보니 마주

앉아 장래의 꿈만 꿀 뿐이요 별도리가 나서지 않았던 것 이었다。

이윽고 공주님이 보퉁이 속에서 가지고 온 순금 얼마를 내놓으며 이것을 자자(市: 시장)에 가지고

가서 시량(柴糧 : 장작과 양식)을 사고 생활 기구를 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동이는 의외에도 대소를 하며 내놓은 순금을 가르치며「이 물건이 무어요?」하고

물었다。공주님은「이것이 순금이라는 것으로 백년의 부를 누릴 수 있는 것인데 필요한 것이요」

하니 마동이가 하는 말이「이런 것은 내가 소시(少時 : 어릴 적---편집자 주)에 산에 가서 마를

캘 적에 땅에서 많이 나오던 것으로 지금도 가보면 노적가리처럼 쌓여있을 것이요」하였다。

 

공주님은 이 말을 듣고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의아(疑訝)하면서 한편 순금이 이렇게 많은 것에

놀랬다。공주님은 일변 반가워서「이것은 천하에 그리 없는 보배로 우리 신라서울에서는 대단히

귀하게 아는 것이니 만일에 금나는 곳을 알거든 이것을 갖다가 우리 부모 궁전에 보냈으면 하겠오

」하였다。

 

마동이는「그리 합시다」하고 금나는 데를 가서 순금덩이를 파서 집에 쌓고 쌓아서 큼직한 짐덩이

같이 모아놓았다。그러나 이만한 금덩이를 어떻게 하면 신라에 게신 부모궁전에 보내노? 하고

공주님은 생각하던 차 집 근처 용화산 사자사(獅子寺)스님중이 신력(神力)이 있어서 모든 일을

앉아서 신을 부린다는 말을 듣고 신술부리는 법사 중에게 가서 금 보낼 꾀를 물었다。

 

법사는「걱정할 것 없오이다 내가 신의 힘으로 보내게 할 터이니 금이나 이곳 절로 보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공주님은 이 말을 듣자 기뻐해서 곧 집으로 내려와서 금을 절(寺)로 옮기는

동시에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사자사(獅子寺)의 법사에게 보내었더니 법사는 하루 저녁에

그 많은 금을 신라 궁궐 안으로 옮겨주고 겸하여 공주님의 편지까지 보내었었다。

 

신라 진평왕이 하루아침에는 별 볼일 없이 일찍이 기침을 하시고 원내(苑內)로 아침 거동을 하려

는데 궁전 뜰 앞에 난데없는 금이 그득히 쌓여 있는 것을 보시고 하도 이상하여 가까이 가보니까

그곳에는 편지 한 장이 있었다。

 

내용을 보니 몇 해 전 귀양 보내었던 셋째 따님 선화공주님의 글발이 적혀 있었다。

진평왕은 신의 조화임을 기이하게 알았으며 더욱이 공주님이 백제 땅에 가서 잘 있다는 것을

다행히 여겼었다。

 

그 후부터 공주님과 마동이는 신라왕으로부터 서신이 있으며 이곳으로도 문안편지가 끊일 사이가

없었다。마동이는 그러는 사이에 인심을 얻고 덕을 베풀어 백제국민으로도 마동의 존재를

인식케 되었었다。

 

그 당시 백제에서는 제29대 법왕이 돌아가시고 뒷 임금을 물색하는 판에 백성들은 마동을 백제왕

으로 추대하여 정식으로 백제 서울 소부리 지금의「부여」로 오시게 하였다。

부여로 오신 후 국무에 열심 하시고 정치를 잘하시는 고로 백성들이 모두 찬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왕은 42년간 선치(善治)를 하였다고 역사에 뚜렷이 적혀있다。

 

지금 부여 남쪽에 있는 「마골」은 마동이가 낳고 자라던 곳이라 하여 「마골」이라 하며

「마래방죽」은 마동이의 어머님이 사시고 노신 못이라 하여「마래방죽」이라는 명칭이

있다 한다。

 

(이 전설 취재는 삼국유사 삼국사기와 현 지명을 참조함) 마래방죽에는 지금도 방죽 중앙에는

그 당시 섬(島)이 있어 개야지(蒲柳) 넝쿨이 있으며 물이 빠지는 염창리(鹽倉里)와 나성(羅城)

끝에 「파래굴」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삼국사기에 방장산(方丈山)을 모방하고 물길을 20리

끌어들였을 때 물길을「파냈」다 하여 「파래굴」이라 한다고 한다。

 

--- 이 글은 연제 홍사준선생님께서 1930년대에 쓰신 글입니다. 본문은 선생님께서 쓰신 그대로 두고 맞춤법만 현행 맞춤법에 맞게 고쳤습니다. 그리고 일부 어려운 한자 표현은 “시량(柴糧 : 장작과 양식)” 과 같이 각주를 달아서 이해하기 쉽게 하였습니다. ---